본문 바로가기

일상

21.12.07 근황

낙동강 오리알 신세.

정확한 어원을 알 수 없다지만, 현재 내 상황을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입사하자마자 맡았던 브랜드는 매출이 벼랑끝에 놓이자 '접자'를 선언하고선 얼마 안있어 '다시 살려보자'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이마저 윗 분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방향조차 잡지 못한체 월급루팡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다. 어떻게 살릴지 다음주에 얘기하자고 했던게 벌써 한달 반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내 옆자리 동료가 '저새끼 개꿀빠네' 하며 눈으로 레이저쏘고 있었지만, 남몰래 폭풍과 같은시간을 보냈다. 나의 다음 행선지를 찾기 위하여.

브랜드가 엎어지던 시점, 나는 4개쯤 모았던 드래곤볼을 모두 잃어버린 손오공과 같았다. 오로지 브랜드가 잘되는길이 내가 대성하는 길이라 굳건히 믿고 있었기에 실망이 컸고, 좌절했었다. 처음엔 회사탓을 많이 했지만 책임자는 결국 나였고 좋은 결과로 이끌어내지 못한것도 나였으니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내 브랜드가 아닌 회사에 귀속시키기로 동의했다. 

그래도 원래 목표로 했던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입사 당시 당당하게 내 브랜드를 만드는게 최종 목표라고 말했던것처럼, 지금까지는 과정일 뿐일것이다. 혼자서 많은것들을 해나가다보니 점점 지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많은것들을 경험하고 배웠다. 어디서도 할 수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그런 경험을 다시 내가 만들 브랜드에 다시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던중, 브랜드가 엎어지기 직전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입점하려고 했던 유명 편집샵이 하나 있었는데,뜻밖의 제안을 받게되었다. 입점이 아닌 이직 제안. 규모는 작아보여도 점점 매출이 늘어가는 상황이라 사세확장을 계획중이었고, 지금까지 대표가 직접 디자인 관련업무들을 해왔었는데 이제는 대신해줄 인력이 필요하는것이었다. 처음엔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 당황스러웠지만 안경에서 자연스럽게 패션쪽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상균햄쪽에서 젠몬 채용 소식을 전해 왔다. 아이웨어 디자인팀에서 그만두는 사람이 생겼는데, 원래도 일손이 부족한 터라 하루 빨리 채용하려는 눈치였다. 일단은 기존 작업들을 정리해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 편집샵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 어떤일들을 해주었으면하는지, 연봉은 얼마나 생각하는지.
해야할 업무는 정말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자체브랜드 로고와 택, 패키지 등 대부분 그래픽 위주의 작업들이었고, 작게는 공장 작업지시를 위한 문서 양식부터 만드는 것 부터, 크게는 홈페이지 개편과 제품 상세페이지 촬영 및 업로드, 그리고 자체 브랜드 수출을 위한 브랜딩과 화보 촬영까지 필요로 했다. 각각의 업무들을 세분화하면 전혀 다른일이고 심지어 작은일도 아니지만 쉽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퀄리티와 대표가 생각하는 기대치가 상이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하게되면 더 많은일들이 있을 거라 예상 되지만, 얘기한 업무들만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브랜드를 접을 생각을 했던것인데, 안경과 전혀 상관없는일이고, 돈을 많이 받는게 아니라면 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안경만으로 브랜드 만들어 키우고 먹고 산다는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안경쟁이에서 좀 벋어나 무언가와 접목해 더 크게 생각하고 멀리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리고 대표가 슈론이라는 미국 안경을 수입해 유통했던 경험이 있어 안경쪽 굵직한 인맥들이 포진되어있었으며 그 인맥들을 활용해 안경을 만들어 판매하고싶은 욕심도 가지고 있어 나로선 패션과 안경을 접목해 브랜드를 만들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외 부수적인일들이야 안경에서 의류로 품목만 변경됐을뿐 했었던 일들과 비슷하기에 하면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바꼈다. 그리고 화보 촬영 기획 경험을 살려 의류 브랜드를 키워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또 원래 옷을 좋아하지 않던가, 무튼 이래저래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들이 흘러갔다.

일단은 이야기가 잘 끝났고, 상의해보고 연락준다 했다. 이날은 식사없이 7시반쯤 지하철로 향했다.

다음날, 상균햄은 벌써 다른 지원자 면접일정이 잡혔으니 빨리 포폴을 보내면 좋을것같다는 말에 허겁지겁 작업물들을 정리해 보냈지만, 일단 편집샵 이직 여부가 정해지고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두 곳 다 오지말라하면 다행이지만 두 곳 다 출근하라고하면 나도, 상균햄도 난처해질게 눈에 선했다. 그리고 내 마음도 편집샵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기에 일단 포폴 전달을 보류해 달라고 상균햄한테 이야기했다.

이력서에 첨부했던 급조 이미지. (포트레이트 계정 언제 정리하지...)

-

금방이라도 연락을 줄거같이 이야기 했었는데 연락이 없자 초초해 지고 있었다. 4일째 되던 날 먼저 전화하려다 좀더 기다려 보자고 꾹 참았는데, 젠몬도 걸려있었기에 딱 1주일 되던 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죄송합니다.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할법한 말임에도 전혀 예상지 못한 답이라 어버버 하다 금주중으로 연락 주겠다는말에 '알겠습니다' 라는 말만 하고 통화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분명 마지막 만남에서 분위기가 좋았고 연봉만 조율되면 당장이라도 일할 분위기였는데, 첫 출근날만 정하면 될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알게모르게 기대하고 있었고 하루빨리 이직하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뒤늦게 내 연봉이 부담이 되는구나 라는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없던 직무의 사람이었고, 없던 지출이 늘어나는것이기에 충분한 논의가 필요했던게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게 실망감보다는 묵은 체증이 내려간것처럼 마음이 편해지는건 뭐 때문일까. 알 수 없다. 

편집샵으로의 이직이 어려울수도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한 다음 젠몬에 지원하는게 맞는거 같아 상균햄한테 전화해 좀더 기다려 보겠다고 내 의사를 전했다. 그 사이 다른사람이 뽑혀도 하는 수 없다. 또 자리야 나겠지.

기다려보자. 어디든 길이 있지 않겠는가.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길은 어디에  (0) 2021.08.06
돌아본 7월  (0) 2021.08.03